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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초반에 상훈과 기훈은 심각하게 어른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자신과 가족을 건사한다는, 한 사람이 어른으로 불리는 데 절대적인 필요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상훈이 가장의 자리를 상실하고 기훈이 마흔 넘어서도 어른대접 대신 "많이 이상한 애" 취급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청소방을 시작한 상훈이 갑질하는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천재 감독의 아우라를 잊지 못하던 기훈이 "몸을 쓰고 몸을 느끼는" 일의 미덕을 예찬하며 동훈에게 고급 참치를 샀을 때, 

상훈과 기훈은 그들에게 집요하게 어른의 자격을 추궁하던 어떤 통과의례를 가까스로, 잠시나마 통과한 셈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속력을 높이거나 급커브를 틀어도 휘청이고 넘어지는 다마스처럼, 

그들의 어른행 드라이브는 여전히 위태위태하고 짠하다.

장판 아래에 늘어가는 오만원권 지폐들이 상훈의 가정으로의 복귀나 "인생의 기똥찬 순간"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여배우와의 "양심 없는" 연애를 기훈은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을까?

상훈과 기훈 자신도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진 못할 것 같다. 그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답이 보이지 않아도 계속, 뻔뻔하게 악셀을 밟는 것뿐이다. 

그 가속의 결과가 또 한번 보기 좋게 넘어져 보기 흉한 기스 한 줄을 더하는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인생이 그들의 다마스처럼 보기보단 맷집이 좋고 튼튼하다는 것이다. 


툭하면 넘어지고 각종 우스꽝스런 곡예를 부릴지언정 부서지거나 멈춰 서진 않는, 그렇게 험하게 굴러먹었는데도 딱히 심하게 찌그러진 구석이 보이진 않는 신통방통한 다마스는 그 주인들을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닮아 있다.

작고 낡은 그 다마스가 어떤 외력에도 상훈과 기훈의 몸만큼은 어디 하나 상한 곳 없이 지켜주었듯이, 

부침 심한 인생의 곡예를 견뎌온 두 사람의 내력이, 

그리고 그 내력의 근원이기도 할 "나는 내가 좋아"라는 신비한 자기애와 낙관적 천성이 

앞으로도 상훈과 기훈을 어떻게든 지탱해주고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 같다.

매일 욕은 들어도,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졸이게 하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낼 줄 아는 상훈과 기훈이, 효자들이었다.



"한반도에 지진 6이 오겠냐?"

다분히 정치적 판단이 개입된 윤상무의 안이한 진단에 동훈은 '구조기술사는 구조적 판단만 합니다'라는 원칙으로 답한다. 

건축사와 구조기술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21살 지안의 눈에도 어느 쪽이 책임 있는 어른인지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송과장처럼 과장급만 되어도 때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판단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배제해왔을 동훈이 "만년 부장"으로 지금껏 버텨냈다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야 할 일일지 모른다. 

구청에 제출할 안전진단 보고서에 "책임기술자 박동훈"이라는 이름과 함께 찍힌 도장에는 동훈의 전문성과 양심이 함께 꾸욱 찍혀 있다.

이 드라마에서 동훈이 보여주는 어른의 자격에는 직업적 양심과 시민성이 기본 옵션처럼 포함되어 있다. 

(어머니댁에 다녀오던 동훈과 윤희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을 때 동훈은 사회적 약자에 관한 질문인 최저임금의 답을 맞추는 반면 윤희가 좀 더 정치적 성격을 띠는 지방선거 날짜를 맞추는 것은 상징적이다) 



"손녀는 부양의무자 아니야... 그런 거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냐?" 

동훈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말했을 수도 있는 이 말은 지안에게는 거대한 의미를 지녔다.  

후계동의 복지 담당 공무원도, 비싼 돈을 내고 봉애가 머물렀던 사설 요양원도 무슨 이유에선지 알려주지 않았던 이 정보로 지안과 봉애의 숨막히던 삶에 한 줄기 숨통이 트인다.

그때까지 지안에게 천만원을 벌 수 있는 '봉'이거나 '잘 사는 좋은 사람'에 불과했던 동훈은 이 일로 인해 지안과 봉애의 '은인'이 된다. 

(그리고 동훈이 광일과 싸우며 지안의 살인 전력마저 이해해주었을 때 동훈은 지안의 '마음의 은인'으로까지 격상된다)

동훈의 선의에 기댈 수도 있었던 지안이 결국 도준영의 돈으로 천만원의 빚을 갚고 도준영을 등쳐먹는 길을 택했을 때, 이미 지안은 결코 은인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는 팽팽한 결의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결의가 생전 처음 움텄을지 모를 정체불명의 감정과 충돌하기 시작했을 때, 

지안은 누구라도 소중히 하고 싶을 그 순정을 스스로 "미친 년"이 되는 방식으로 무참히 짓이기거나 

표독한 사람들의 눈 앞에 고통스럽게 전시하기까지 할 수 있었던, 

무섭도록 예의가 바른 '어른'이었다.



도준영은 여러 면에서 어른의 조건이 아닌 비어른의 조건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치 일곱살짜리 아이처럼 그는 가지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면 안달이 나서 견디질 못한다

대학시절 좋아하는 여인을 따라 자신과 맞지도 않는 동아리에 들어갔다는 일화는 거기서 그쳤더라면 꽤 낭만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번 갖고 싶어한 그것을 20년 동안 포기할 줄 모르고 탐한다

그가 안고 싶었고 갖고 싶었던 여인을 기어이 품에 안았을 때, 그래서 신이 난 아이처럼 동훈 앞에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고 '이별의 예의'를 지키려 하는 윤희와 달리,

온전히 은인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은 물론 밥줄조차 내던질 수 있었던 지안과 달리, 

도준영은 선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내던진 사람이었고, 헤어진 연인에게 "니가 제일 비겁해" 따위의 말을 하는 후진 남자였으며, 자기보다 스무 살도 어린 여자의 마음을 조롱하고 만날 때마다 떼를 부리는 '아이'였다.

  


요양원에서 동훈은 뜻하지 않게 봉애로부터 유언에 해당하는 말을 받는다.

동훈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지안이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란 그 유언은 사실상 동훈을 지안의 '보호자'로 임명하고 있었고, 

봉애가 동훈의 손을 붙들어 이마에 갖다댄 그 멋쩍은 순간은 '슬픈 위임식'과 다름이 없었다.

동훈이 폭주하는 지안의 뒤통수를 가차없이 후려갈기고, 사람들을 대하는 지안의 태도를 꾸짖으며, 지안을 한 발 더 넓은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신도 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런 보호자로서의 책무를 이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동훈은 "선생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어른이었다.



지안이 받은 만큼 갚아준다는 '등가 관념'이 예민한 아이라면 동훈은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거리 감각'에 예민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는 사수가 밀려난 자리에 올라가기를 꺼리는 사람이고, 첫 만남에서 밝게 인사하는 유라에게 데면데면 거리를 두는 사람이며, 20대에 이성과 보름 동안 숙식을 같이 하면서도 아무일도 없었던 사람이다.

아내 윤희의 간절한 바람에도 그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일정 거리 이상 결코 밀어내지 않으며, 

반면 정작 윤희와의 사이에서는 윤희가 바랐을 한없는 밀착을 회피하거나 거부한다.

 

이런 동훈에게, 그가 어쩌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음의 후견인'이 되어버린 지안과의 사이에는 마치 지구와 달 사이에 유지되는 궤도처럼 절대적으로 유지되고 사수되어야 할 어떤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관계에서는 그 거리가 극복되어야 할 진공이나 장애일 수 있지만

지안과 동훈의 경우 그 거리는 오히려 두 사람의 동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자 가능성으로 가득한 창공에 가까워 보인다. 

마치 조금만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져도 지구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는 달이 자기 궤도를 지키면서 지구의 밤을 밝힐 빛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동훈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궤도의 진폭을 조정하고 수정하는 위성처럼, 지안과의 거리를 조정하고 수정할 것이다. 

만일 지안이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면 다시 한번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고 

지안이 어떤 외력에 의해 튕겨나간다면 힘껏 쫓아가 붙잡고 아마도 이런 말을, 몇 번이고, 투하할 것이다. 

"또 왜 어디 가는데?" "슬리퍼 왜 안 사오는데??"


언젠가 지안의 삶에도 찬란한 태양이 떠올라 달의 존재감 자체가 희미해지는 날이 왔을 때, 

지안이 마른 하늘에 여전히 떠 있을지 모를 쓸쓸한 달을 향해서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깊이 바랄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달은 지구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수혜를 주는 존재가 아니다. 궤도가 조정되고 유지되는 것은 달과 지구 쌍방의 힘에 의한 것이다. 

달이 지구의 밤을 밝혀주는 것 이상으로 지구는 달의 적막한 어둠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지구에서 볼 때 달은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지만, 달에서 볼 때 지구는 더 크고 더 아름답고 더 신비로운 존재다) 



남편으로서의 단점과 한계와는 별개로, 동훈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은 가끔 시청자를 좌절시킨다 

나는 아무리 해도 저런 어른은 될 수 없을 거 같은데.. 동훈이야말로 재벌2세를 능가하는 판타지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달'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어른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싶기도 하고 그나마 '선생님'이라고 경의를 담아 부를 만한 어른도 극히 드물다. 

이 드라마의 제목이 '나의 어른'이 아니라 '나의 아저씨'인 것은 그래서 차라리 시청자들을 위한 배려인 것처럼 보인다.

어른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앞에서 처음부터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평범한 '아저씨'나 '아줌마'가 되는 정도라면 조금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다 만났을 때 반갑게 아는 체를 하고, 장례식에 찾아가주고, "우리 가게에 놀러와요"라고 얘기해주고, 안전한 귀가를 도와주거나 창문을 열어 이상한 놈이 기웃거리는지를 살펴봐주는 단순한 행위로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아닌 사람들이 된다 (사실 동훈이 지안에게 준 결정적 도움인 요양제도에 관한 정보도 누구라도 알려줄 수 있었을 종류의 것이었다)

'나의 아저씨'나 '나의 아줌마'가 아니라 그냥 '우리 동네 아줌마'나 '아는 아저씨' 정도로도 충분히 멋지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는 정희네 후계 패밀리나 안전3팀 사람들, "도와줘요?"라고 물어주었던 약사 아주머니 같은 사람들을 통해 보여준다)


고작 네 번 도움을 주고 도망치더라도.. 아니 딱 한 번 도움을 주고 말아버리는 수준이라 해도 괜찮다. 

"자기가 착한 사람인 줄" 확인하고 싶어서 베푸는 얄팍한 선의라 해서 나쁠 것은 없다. 한번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쌔고 쌨으니 말이다 (아마도 언젠가는 지안이도 자신에게 어설프게 선의를 베풀다 오히려 상처를 주었던 이들의 허약함을 이해하고 고마워하게 될 것이다)

단 한 조각의 선의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지옥을 허무는 기적이 꼭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어른의 조건은 무엇인가

여전히, 그리고 드라마가 종영한 뒤라 해도, 한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드라마가 전하는 어른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라고 바꿔 말해도 아무 위화감이 없을 만큼 깊고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인간은, 인생은, 한 겹이 아니다.


그래도 이 드라마를 통해 어른을 묘사하는 몇 가지 표현 정도는 드라마가 끝나지 않은 지금이라도 충분히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른이란, 

생계와 가족을 위해 무릎을 꿇거나 평생의 꿈을 그저 꿈으로 남겨두는 것을 굴욕이나 패배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10년 전의 기훈처럼) 자신의 수치를 남의 수치로 가리는 치사빤스 같은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고, 10년씩 묻어두었던 잘못도 고백하고 사과하고 책임질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의 안전과 생명이 걸려 있을 수 있는 문제 앞에선 손익 계산이나 정치적 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 사람이라고,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별볼일 없다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사람이라고, 

만나면 불편하고 껄끄러운 관계보다는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관계들을 늘려가고, 자기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살면서 한번쯤은 누군가에게 "나랑 친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좋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미움이나 질투나 욕망의 발로에서가 아니라, 그저 선의에서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아스라이 흔들리는, 누군가의 간절한 수화에 마음을 다해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출처 : http://gall.dcinside.com/mymister/27937



Posted by 터프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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