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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다린다는 설렘이 생긴 지 3주가 됐습니다.
만남이 있은 후에도
깊고 진한 여운 때문에
멍하니 앉은 자리를 떠날 수 없는...
tvN의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가 그 대상입니다.

방영 첫 주가 지난 후부터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러나 이젠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네요.

[미생], [시그널]이란 두 드라마로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의 새 지평을 열었던 김원석 감독,
[또 오해영]에서 
대사의 찰진 감칠맛을 느끼게 해 주었던
박해영 작가의 합작품이죠.


여기 두 남녀가 있습니다.

45세 남자 '동훈(이선균)'.
대기업 삼환 E&C에 근무하는 건축구조기술사.
대학 후배인 '준영(김영민)'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한직으로 내몰린 만년 부장.
변호사인 아내 '윤희(이지아)'는 준영과 외도 중.
하나 뿐인 아들은 외국에서 유학 중.
노모에게 얹혀사는 궁상맞은 형제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낙인,
소심하고 내성적이지만 
인내심과 배려심 만큼은 남다른 남자.
나이를 먹은 '장그래'로도 보이기도 하는,
미생의 삶을 살아가는 남자...

21세 여자 '지안(이지은)'.
여섯 살에 부모를 여의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홀로 부양하다
할머니를 폭행하는 사채업자를 살해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감춘 여자.
그 사채업자의 아들인 '광일(장기용)'에게 
여전히 시달리면서도 
사랑하는 할머니로 인해 
함부로 삶을 포기할 수도 없는 여자.
특기도 취미도 달리기 뿐인,
달릴 때는 내가 없어진다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다는 여자.
세상에 대한 증오에 웃음과 따뜻함을 잃고
사람들을 향한 경멸과 혐오만 남긴 여자.
하지만,
몰래 가져 온 쇼핑카트에 병든 할머니를 태우고
보름달을 선물하는 착한 감성을 지닌 여자...


그 둘은 왠지 서로에게 눈길이 갑니다.
자신의 어깨에 천근짜리 짐을 얹고 있건만
상대방의 어깨에 얹혀진 만근짜리 짐에 
더 눈길이 갑니다.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짐에 눈길을 주기엔
자신의 삶이 너무도 가엾고 불쌍해서인지
동훈과 지안의 연민과 위로는 서로를 향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 잘 돼."
"나도 싫어해 줄래요? 
엄청나게 끝간 데 없이, 아주아주 열심히.
나도 아저씨 싫어해 줄게요. 아주아주 열심히." 

"내가 유혹에 강한 인간이라 여태 사고 안 친 것 같아?
유혹이 없었던 거야." 

"지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잠이 오지?
어떻게 하면 월 600을 벌어도 지겹게 보일 수 있을까?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나도 무릎 꿇은 적 있어.
그 와중에도 다행이다 싶은 건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내가 무슨 모욕을 당해도 우리 식구만 모르면
아무 것도 아냐." 

"누가 나를 알아. 나도 걔를 알 것 같구.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잘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 되기 쉬어." 

"내가 오늘 못 죽어. 비싼 팬티가 아냐." 

"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냥 모르는 척 해.
내가 상처받은 거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냐."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모르는 척 해줄게. 너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니 너도 약속해주라. 모르는 척 해주겠다고.
겁나. 넌 말 안해도 다 알 것 같아서." 

"밥 좀 사주죠." 
"술도 사줄게." 

"내가 불쌍해서 마음이 편해지셨나? 막 사주네?" 
"내 인생이 니 인생보다 낫지 않고,
너 불쌍해서 사주는 게 아니라 고마워서 사주는 거야."

"현실이 지옥이야. 지옥에 온 이유가 있겠지.
벌 다 받다 가면 되겠지." 

"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인생의 내력이 뭔데요?"
"몰라."


둘 사이에서 선문답처럼 오고가는 대화들,
다른 이들과 함께 할 때 서로를 묘사하는 대사들은
이렇게 한없이 어둡고 비관적이고 쓸쓸하지만
묘하게도 깨달음과 위로를 줍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고맙다", "착하다", "행복하자", "파이팅",
심지어 술잔을 부딪치는 건배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관성처럼, 습관처럼 
무심코 내뱉는 말과 행동들이
이 드라마에서는 너무도 신중하고 소중하게 쓰여
곱씹고 또 곱씹게 만드는 매력으로 탈바꿈하죠.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 멋진 대사들은
이선균과 이지은,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의해
의미와 생기를 부여받습니다.
대본이 완성된 후 배우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대본으로 느껴지죠.

'억울갑'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우는
이선균 배우는 이제 경지에 도달한 느낌입니다.
무심하게 툭툭 내뱉는 대사의 리듬감이 좋습니다.
대사 없이 훅훅 내뱉는 숨소리도 좋습니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애써 감춘 듯한 표정과
문득문득 분출되는 정의감도 좋습니다.

아이유, 아니 이지은은 
이제 배우로서 불려도 충분합니다.
그녀만이 갖고있는 특유의 우울함은
이지안이라는 독특한 배역을 통해 빛을 발합니다.
대한민국 드라마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을까요.
굳이 찾자면,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떠오르네요.
냉혹한 현실을 온 몸으로 버텨내는 여자.
다만, 리스베트에게는 가죽재킷이 있지만
지안은 춥게 입었을 뿐이고
리스베트는 오토바이로 질주하지만
지안은 그저 달릴 뿐...


김원석 감독의 작품에서 
낭비되거나 버려지는 인물이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그 부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든 조역들의 연기력이 만족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빛나는 건 
'송새벽' 배우입니다.

2009년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세팍타크로 형사'로 충격적인 데뷔를 했고
2010년 [방자전]과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대체불가능한 개성을 보여주었다가
이미지의 과소비와 슬럼프로 
어느새 잊혀진 배우가 되었던 그는
동훈의 동생, 기훈으로서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예전의 그와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나의 아저씨]의 무게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주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송새벽으로 느껴집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신인 영화감독에서
끝없는 추락을 거듭한 기훈에게
기훈의 추락을 그리도 원했던 '유라(나라)'가 말하죠.
"인간은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하고 살아요.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서 좋아보였어요.
망해도 괜찮구나.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망해도 행복할 수 있구나."


네 그렇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모진 편견에서 비롯된 오해에 시달리는
이 명품 드라마는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의 사랑을 예쁘게 포장하는,
그런 못난 작품이 아닙니다.
 
두 어깨에 한가득 짐을 얹고
천근만근 두 발을 질질 끌고
망하면 어떡하지 하는 속절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성실한 무기징역수처럼 꾸역꾸역 
지옥같은 현실을 버텨내는,
그래서 때로는 
스스로가 너무 가엽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우리들, 그냥 보통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그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위로와 용기를 주는 드라마입니다.


이제 이 드라마는 이야기의 반을 끝냈습니다.
동훈과 지안의 이야기가,
그들을 둘러 싼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디로 향할 지를, 나는 모릅니다.
동훈과 지안의 서로를 향한 연민과 위로가
마침내 스스로에게 가 닿을 지를,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드라마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가슴이 벅차 리뷰를 쓸 것임은 알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 없겠죠.
지안의 테마로 쓰이는 "어른"이란 곡이 특히 끌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습니다.
가수는 'Sondia'입니다.
그 곡의 1절 가사를 알려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눈을 감아보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깰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갤 거라고...



출처 http://mlbpark.donga.com/mp/b.php?m=user&user=hixx64&site=donga.com

Posted by 터프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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